- 호르무즈 해협 봉쇄·산유국 감산 여파 속 나프타·원유 수급 차질과 금융시장 경색
[세계뉴스 = 박근종 칼럼니스트]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 충돌이 확전 양상을 보이며 장기 국면에 접어들면서, 세계 경제에 ‘오일 쇼크’를 넘어선 고유가·고환율·고물가의 ‘신(新) 3고’ 공포가 짙어지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훼손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수출 위축과 내수 침체가 겹치며 1970년대 오일쇼크 때처럼 경기 침체 속 물가 급등,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른다.
국제유가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전격 공습 이후 불과 일주일 새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기준 36% 폭등, 배럴당 90달러를 넘어섰다. 주간 기준으로는 1983년 이후 최대 상승 폭이다. 한국이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 역시 지난달 말 배럴당 60달러 후반에서 100달러 안팎까지 치솟았다. 글로벌 원유 물동량의 20~30%가 지나는 전략 요충지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된 데다, 쿠웨이트 등 산유국들이 저장시설 한계로 감산에 나서면서 공급 충격이 겹친 결과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역시 3주 안에 저장능력이 한계에 달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등 중동 전역에서 생산 차질 우려가 번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분쟁이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경우 국제유가가 이번 주 안에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고 내다봤다. 카타르 에너지 장관은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오를 수 있으며, 이는 세계 경제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경고했다.
세계에서 경제 규모 대비 석유 소비 비중이 가장 높은 한국은 고유가 충격에 특히 취약하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안팎으로 오를 경우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최소 0.3%포인트 떨어지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1%포인트 높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하는 ‘오일 쇼크’ 시나리오에서는 성장률이 0.8%포인트 하락하고 물가는 2.9%포인트나 추가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놨다. 이 경우 물가가 다시 3~5%대 고물가 구간으로 재진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진단이다.
이미 전쟁 발발 이전부터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6개월 연속 2%대를 기록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연간 물가가 5%대로 치솟았던 악몽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든다. 물가 불안이 확산하면 가계 실질소득이 줄어 내수가 얼어붙고, 기업 투자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산업 현장에선 벌써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철강·자동차 등 주요 수출기업들은 원유 가격 급등으로 생산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고, 항공·해운·물류 전반에서 비용 부담과 손실이 속출하는 상황이다. 이런 추세가 이어질 경우 정부와 한국은행이 제시한 올해 2% 성장 목표가 무너지고 경상수지 악화가 가속화될 것이란 비관론이 힘을 얻고 있다.
직격탄은 원유·석유화학 공급망에서 먼저 나타났다. 이란 정권 교체를 겨냥한 미국과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며 맞서는 이란의 충돌이 격화되자, 나프타 원료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여천NCC 등 나프타분해시설 업체들은 고객사에 제품 공급 지연을 통보했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 재고가 2주 치에 불과해 비상이 걸린 것이다. 나프타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물질로 별도 전략비축 품목이 아니어서 공급 차질에 취약하다. 핵심 원료인 나프타가 막히면 석유화학 공장 가동 자체가 어려워진다. 나프타분해시설(NCC) 가동률이 더 떨어질 경우 플라스틱, 합성섬유 등 범용 화학제품 공급에도 연쇄 타격이 불가피하다.
고유가 여파는 물류·농업 등 실물 경제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화물차 기사들은 유류비 급등으로 실질 소득이 급감했고, 비닐하우스에서 난방비에 의존하는 시설 농가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휘발유 가격 담합 단속과 100조원대 금융안정 조치 등을 내놓았지만, 충격을 흡수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회의론이 적지 않다. 나프타는 국내 정유사 생산과 수입 물량이 절반씩인데, 수입분의 60%가 중동산이다. 원유 역시 71%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어 정유사들도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금융시장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크리스토퍼 월러 이사는 “유가 충격이 장기화하면 물가를 다시 끌어올릴 것”이라며 인플레이션 재점화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에 따라 연내 미 기준금리 인하 기대는 크게 낮아졌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추가 금리 인하를 중단하거나 긴축 기조를 유지할 경우 채권 금리 상승과 자금시장 경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원유 가격 급등과 금융시장 불안이 실물 경제로 전이되면 한국 경제는 이중, 삼중의 충격을 피하기 어렵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을 2% 안팎으로 전망했지만, 이는 국제유가를 배럴당 62달러 수준으로 가정한 수치다. 중동 사태가 공급망 마비와 세계 교역 축소로 이어지고, 이미 위축된 소비가 더 얼어붙을 경우 성장률은 크게 하향 조정될 수밖에 없다.
중동발 경제 충격이 본격화되면서 국내외 석유업체들은 잇따라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을 발동, 정상적인 제품 공급이 어렵다고 선언하고 있다. 쿠웨이트 석유공사는 지난 7일(현지시간)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으로 정상적인 수출이 불가능해 원유 및 정제 처리량을 감축하겠다며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면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책임을 면제해 주는 조항이다. 다른 산유국들의 감산 조치도 잇따를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현재 200일분 이상의 비축유를 확보하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글로벌 공급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만큼 어디서 어떤 ‘구멍’이 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상정해 경제 안전판을 보강하고 방파제를 높이는 한편, 추가경정예산 편성까지 포함한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경제 상황을 실시간으로 점검·조율하는 컨트롤타워이자 ‘경제 워룸(War room)’을 설치해 위기 대응을 총괄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유가 상승은 각종 석유류 제품 가격뿐 아니라 운송비·생산비를 밀어올려 식품, 공산품, 서비스 전반의 가격 상승을 부추긴다. 에틸렌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각종 석유화학제품 생산도 줄줄이 타격을 받는다. 중동발 물가 충격은 외부 변수에 따른 만큼 정부 대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를 틈탄 가격 ‘꼼수 인상’과 업체 간 담합은 강력히 단속해 원가 상승 이상의 물가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상황이 심각해질 경우 정부는 비축유 방출, 유류세 인하 등 시장 안정 조치를 시기를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실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최근 UAE에서 600만 배럴 이상의 원유 도입을 추진 중이지만, 이는 국내 2~3일 치 소비량에 불과하다. 원유와 천연가스의 대체 공급처를 서둘러 확보하고, 해상 운임·보험료 지원 등을 통해 비용 충격을 완화하는 공급망 안정 대책이 시급하다는 평가다. 유가 수준에 맞춘 자가용 운행 자제 등 단계별 수요 억제 방안도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
저소득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에너지 바우처, 유류세 환급 등 맞춤형 지원을 통해 서민 부담을 덜어주는 세밀한 정책도 요구된다. 물가 상승 압력이 전방위로 확산하면서 정부가 주택·통신·의약품, 일반 공산품과 서비스까지 가격 통제에 나설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전문가들은 글로벌 인플레이션 ‘쓰나미’를 인위적 가격 통제로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신 시장을 교란하는 불공정행위 단속, 비효율적 유통 구조 개선, 공급망 다변화 등 구조적 해법과 취약계층에 대한 ‘핀셋 지원’이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한국 경제는 이미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로 불균형이 심화된 상태다. 자영업자와 서민이 체감하는 경기는 여전히 ‘한겨울’ 수준이다. 지난해 4분기 소득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 가구 비율은 25%로 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올해 1월 기준 청년 취업자 수는 통계 작성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코스피는 한때 6,300선을 돌파하며 상승세를 탔지만 최근 5,000선까지 밀려났고, 원·달러 환율은 1,500원을 위협하고 있다. 기준금리 인하 기대도 사실상 사라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대기업의 실적 호조로 올해 국세 수입이 초과 세수를 기록할 가능성이 점쳐지는 점은 그나마 ‘버팀목’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중동발 ‘신 3고’ 충격이 실물 경제와 금융시장으로 본격 전이되기 전에, 정부와 민간이 함께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한 선제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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