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의 모호한 변경 경계해야…정보 공유와 상호 존중이 동맹의 출발점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찾아온 분단과 전쟁, 그리고 오랜 대립과 긴장의 역사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기술 강국으로 성장했다. 국방 분야에서도 막대한 투자와 기술 개발, 장병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방위 역량을 키워 왔다. 이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은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서 감당해야 할 국방 책임을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미국의 군사력 평가기관 글로벌파이어파워(GFP)는 2026년 한국의 재래식 군사력을 세계 145개국 가운데 5위로 평가했다. 물론 이 순위가 실제 전쟁 수행 능력이나 핵·미사일 위협 대응 능력까지 완벽하게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더 이상 외부의 군사력에만 의존해야 하는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임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성장 과정에서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안보 지원은 대한민국의 생존과 발전에 중요한 기반이 됐다. 그렇다고 과거의 안보 의존 관계가 미래에도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맹은 한쪽이 다른 쪽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역량과 책임을 바탕으로 공동의 안보를 지키는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전쟁이 발생했을 때 한국군이 연합방위를 주도하고, 미국은 동맹으로서 필요한 전력과 지원을 제공하는 구조를 완성하는 것이다. 전작권 전환은 한미동맹의 약화가 아니라 한국군의 책임과 역할을 확대하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을 거론하며 전작권 전환의 조건이 달라졌다는 취지로 밝힌 것은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그는 변화한 안보 환경과 새로운 기준을 강조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엄중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협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전작권 전환을 언제까지 미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북한의 위협은 한국군이 대응 능력을 강화해야 할 이유이지, 전작권 전환을 기약 없이 유보할 포괄적 명분이 될 수는 없다.
더욱이 한반도의 안보 환경은 고정돼 있지 않다. 북한의 군사력과 주변국의 전략, 첨단 무기체계와 전쟁 양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안보 환경의 변화를 이유로 전환 조건을 계속 바꾸거나 새로운 기준을 추가한다면, 전작권 전환은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사실상의 말장난에 불과하다.
국방부가 공개한 전작권 전환계획에는 세 가지 핵심 조건이 담겨 있다. 한국군의 연합방위 주도에 필요한 군사적 능력, 한미동맹의 북한 핵·미사일 위협 대응 능력, 안정적인 전환에 부합하는 한반도 및 역내 안보 환경이다. 양국은 능력별 평가 기준을 토대로 전환 준비 상황을 점검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논쟁의 초점은 전환 조건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이미 합의된 조건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고, 부족한 역량은 무엇이며, 언제까지 보완할 것인지에 있어야 한다.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면 그 근거와 적용 범위를 양국이 협의하고 명확히 밝혀야 한다. 한국군의 준비태세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은 필요하지만, 검증이 무기한 유예의 수단으로 변질돼서도 안 된다.
한국군의 능력을 평가하는 과정에서도 상호 존중이 전제돼야 한다. 동맹국의 군사적 우려를 무조건 배척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이 수십 년간 축적한 군사 역량과 국방 투자의 성과를 충분히 평가하지 않은 채 외부의 시각만으로 전환 시점을 판단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정보 공유 문제도 중요하다. 한미동맹의 핵심은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는 정보 협력과 상호 신뢰다. 그러나 최근 양국의 정보·외교 협력에서는 우려스러운 신호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이 주미한국대사관에 파견할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비자 발급과 외교관 신분 승인을 보류한 것만 봐도 한미 간 정보·외교 협력이 원활하게 작동하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전작권 전환을 위해 한국군의 역량을 검증하겠다는 미국이라면, 그에 걸맞은 정보 공유와 협력 체계부터 뒷받침해야 한다. 동맹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협력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미가 연합방위를 주도할 새로운 지휘구조를 준비하면서 정보 협력의 신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다면 문제다. 전작권 전환을 위해서는 한국군의 독자적인 정보·감시·정찰 능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동맹 차원의 정보 공유와 공동 작전계획 수립도 원활하게 이뤄져야 한다. 정보는 동맹의 핵심 자산이지만, 신뢰를 쌓기 위한 협력의 통로이기도 하다. 상호 간 우려가 있다면 정치적 수사나 일방적인 압박보다 구체적인 협의와 제도적 해결이 앞서야 한다.
전쟁은 어느 나라에도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의 무력 충돌은 첨단 무기와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전작권 전환은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이 지원하는 연합방위 체계를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 한국은 핵심 군사능력과 지휘·통제 체계를 강화하고, 미국은 합의한 전환 절차가 예측 가능하게 진행되도록 협력해야 한다. 양국 모두 동맹의 이익을 말한다면 상대국의 주권과 역량을 존중하는 태도부터 보여야 한다.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출발해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한 국가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이제 국방 책임을 더 크게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주권국가의 국방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다. 동맹은 그 책임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완성하는 파트너다. 전작권 전환은 미국의 허락을 기다리는 문제가 아니라, 한미가 합의한 원칙에 따라 대한민국이 책임국방의 역량을 갖추고 그에 걸맞은 권한을 행사하는 문제다. 이제 한미동맹도 보호와 의존의 관계를 넘어 책임과 신뢰를 공유하는 동맹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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