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종 칼럼] 투자 몰리는 일본 '스타트업', 아시아 창업 허브마저 빼앗길 수는 없어
박근종 칼럼니스트
segyenews7@gmail.com | 2024-08-21 09:18:54
▲ 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 |
[세계뉴스 = 박근종 칼럼니스트] 해외 벤처캐피털(VC │ Venture capital)이 일본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미·중 무역 갈등으로 중국 투자 자금 일부가 일본 벤처 업계로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8월 19일 스타트업 정보사이트 스피다(Spee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해외 VC가 일본 스타트업에 출자한 금액은 225억 엔(약 2,046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69% 급증했다. 이는 일본 내 VC 전체 투자액의 약 20%를 차지한다. 해외 VC의 출자액 증가율은 VC 전체(4% 증가)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올해 7월 이후 미국으로부터 각각 100억 엔, 70억 엔의 투자를 유치한 기업도 나왔다. 해외 VC의 투자액만 놓고 보면 아직 큰 액수는 아니지만 글로벌 투자 자금이 일본의 디지털 전환 수요와 스타트업 성장성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 日本經濟)은 “미·중 마찰로 중국향 투자 자금의 일부가 일본 시장으로 향하고 있는 데다 일본 정부의 해외 VC 유치 정책 등의 지원이 배경”이라며 “풍부한 해외 자금을 끌어들이면 신흥 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대규모 자금 조달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일본 스타트업이 10억 엔 이상 조달한 해외 VC 투자액은 51% 증가한 163억 엔에 달했다. 구글 출신의 인공지능(AI) 연구원 등이 설립한 ‘사카나AI(Sakana AI)’는 지난 1월 약 45억 엔의 자금 조달을 발표했다. 전문직 중개 사이트의 ‘제히토모(Zehitomo)’는 대만의 VC 등에서 11억 엔을 끌어들였다. 7월 이후에도 인사·노무 소프트웨어 업체인 ‘스마트HR’이 미국 최대 글로벌 사모펀드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등에서 약 100억 엔을 조달받았고, 경영관리시스템 업체인 ‘로그래스’도 미국 세쿼이아헤리티지로부터 70억 엔의 조달에 성공했다.
닛케이 아시아는 일본 정부는 글로벌 전문성을 갖춘 벤처펀드에 투자함으로써 일본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고 성장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의 지원도 한몫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가가 지원하는 일본투자공사는 2023년 1월 미국 벤처캐피털 펀드인 뉴 엔터프라이즈 어소시에이츠(New Enterprise Associates)에 투자를 발표했고, 올해 2월에는 영국 아토미코(Atomico)가 운영하는 펀드에 대한 투자도 공개했다. 생성형 AI나 핵융합 기술 등에 관여하는 이른바 딥테크(Deep tech │ 과학적 발견이나 공학적 혁신을 기반으로 한 첨단 기술)기업들의 부상도 일본에서 투자를 장려하고 있다는 것이 닛케이 아시아의 진단이다. 이렇듯 미·중 마찰로 중국에 투자하려던 자금이 일본으로 눈길을 돌리고 일본 정부의 해외 VC 유치 등 정책적 지원도 현지 스타트업에는 큰 힘이 되고 있다.
특히 일본 정부는 2022년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을 통해 스타트업을 국가 성장동력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스타트업 생태계를 육성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장기적으로 10만 개의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100개의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아울러 8,774억 엔 규모인 스타트업 투자를 2027년까지 10조 엔으로 늘리겠다는 야심찬 목표다. 정부의 투자 확대, 규제 완화, 창업교육 강화 등이 뒤따랐다. 정부계 펀드가 미국, 영국의 유력 VC에 출자해 일본 스타트업 투자로 이어지게 하기도 했다. 창업을 꺼리던 문화도 확 달라져 도쿄대에 창업 시설이 생기고 주요 대학도 스타트업 창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창업 불모지’였던 일본이 스타트업을 통해 ‘잃어버린 30년’ 동안 함께 잃은 경제 혁신을 되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올해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럽 최대 스타트업 행사 ‘비바테크 2024’에 참가한 일본 도쿄도 관계자들은 내년 5월 8~9일 개최되는 ‘스시테크’를 적극 홍보하면서 ‘10·10·10’ 계획을 공표하기도 했다. 스시 테크 도쿄에서 스시는 먹는 스시(초밥)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첨단 도시 도쿄(Sustainable High City Tokyo)’의 약자를 의미한다. 글로벌 유니콘 숫자, 스타트업 전체 숫자, 민간과 공공 영역 스타트업 숫자를 각각 10배씩 늘리겠다는 의미다. 비바테크 주최 측은 올해 일본을 ‘올해의 국가’로 선정했다. 올해 현장에서는 유럽 최대 스타트업 축제인 ‘비바테크’와 아시아 최대 스타트업 콘퍼런스를 표방하는 ‘스시테크’의 협업 기대감도 감지됐다.
지난 6월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 64%가 “규제로 어려움을 겪었다”라고 답했다. 가장 큰 경영 애로로는 71%가 ‘자금 조달 어려움’을, 44%가 ‘신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법률·제도’를 꼽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지난 6월 6일 발표한 전국의 창업한 지 7년 미만인 스타트업 300곳을 대상으로 벌인 ‘스타트업 규제 및 경영 환경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 기업의 64%는 국내 기업 규제로 인해 사업 활동 제약이나 경영상 어려움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고 37%는 한국이 미국이나 일본, 중국보다 스타트업 규제 수준이 높다고 답했는데, 규제 수준이 비슷하다고 답한 곳은 57%로 나타났다. 한편 응답 기업의 과반인 54.7%는 ‘규제샌드박스(신기술을 활용한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될 때 일정 기간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해주는 것) 제도’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 이유로는 신청 뒤 승인까지 처리 기간이 길다는 응답이 61.6%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최대 4년인 규제 면제·유예 기간이 짧다는 응답이 51.8%로 뒤를 이었다. 국내 스타트업 활성화를 위해선 49.7%가 진입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동안 일본에 스타트업 문화가 비교적 정착되지 않았고 혁신적인 회사가 한국에 비해 적었지만, 최근 들어서면서 이를 만회하려는 움직임이 극명하게 감지된다. 일본 정부는 비전을 세우고 민·관이 하나로 똘똘 뭉쳐 스타트업 생태계를 키우려는 의지에 불타는 일본의 움직임을 보면 위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은 한국 스타트업도 속속 빨아들이고 있다. 아시아 창업 허브 자리를 일본에 내줄 것이라는 우려까지도 나오고 있다. 한국을 추격하는 후발주자 일본의 기세는 노도(怒濤)와 같아서 참으로 무서울 정도다.
최근들어 인공지능(AI) 등 딥테크를 중심으로 투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국내 스타트업들은 여전히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며 외롭게 싸우는 중이다. 정부가 모든 것을 다 일일이 해줄 수는 없겠지만 스타트업 성장을 위해 제대로 판을 깔아줄 필요는 있다. 아시아 창업 허브마저 일본에 빼앗길 수는 없다. 글로벌 스타트업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스타트업을 발굴·육성하기 위해선 성장 단계별 정부 지원책을 대폭 강화하고,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를 과감하고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타트업들이 규제 걱정, 자금 걱정 없이 뛸 수 있는 여건 조성과 기업 하기 좋은 생태환경을 마련해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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